부부는 서로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어야한다.
미국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자기(me myself)를 물질적 자기(material self), 사회적 자기(social self), 정신적 자기(spiritual self)로 나눴지만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나(I myself)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상상계의 나', '상징계의 나', '실재계의 나'가 그것들이다.
상상계(imaginary)의 나는 거울에 비친 나를 의미한다. 즉 이미지다. 인간은 평생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볼 기회가 없다. 오직 거울이야 유리 혹은 물과 같이 비춰줄 수 있는 중간의 대상에 의지해서 자신을 본다. 다시 말하면, 진짜 나가 아닌 '거울에 비친 나' 혹은 '남이 바라보는 나'가 바로 상상계의 나다. 진짜나와 상상계의 나 사이에 거리가 크면 클수록 정신분열이 강해지게된다.
예를 들면, 여성들이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때가 있다. 나는 그냥 나인데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주름만 늘어가는 상상계의 나의 모습이 거울에 가득해서 진짜 나는 없다고 느낄 때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게 된다.
남성의 경우도 비슷하다. 저녁에 들어와 거울을 보는 순간 소리없는 눈물을 흘린다. 거울속에 피곤에 눌린 상상계의 나를 보면서 아직도 어린 자아를 누르고 아빠로서의 무게를 감당해야하고, 밖에서 인정받지 못한 내가 집에와서도 설 자리없는 상상계의 나를 거울에서 마주하는 순간 진짜 나의 울음이 폭발하는 것이다.
상징계(symbolic)의 나는 '언어로 설명되는 나'를 말한다. 어디학교 출신의 나, 누구의 자식의 나, 누구의 부모의 나, 어떤 경력의 나 처럼 이미지인 상상계의 나를 '말'로 '언어'로 담아내는 것이 바로 상징계의 나다. 이런 말과 언어로 정의내려지는 상징계의 나도 '진짜 나'가 아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시도때도 없이 "엄마! 엄마~ 엄마? 엄마..."라고 자신을 부르지만 그런 엄마도 지치고 힘들 땐 자신의 '엄마'가 필요한 '딸'로 불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돌아가신 엄마를 사진에 있는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상상계의 엄마를 붙들고 울기만 하게된다. 이때 남편이 다가와 장모님 이름 부르며 "○○여사 따님~ 왜이러셔~ 힘내!"라고 자신이 원하는 '상징계의 나'를 불려주면 좋으련만 눈치없이 딸들 이름부르며 "○○엄마 왜그래. 힘내"라고 하면 더 큰 눈물이 난다.
반대로 남성의 경우 식당에서 만난 지인이 "아이고 ○사장~ 반갑구만~ 돈 잘벌지? 한 턱 내야지 언제 쏠꺼야~"라고 말하면, "에이~ 요즘 경기 어려워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 웃고 넘길 수도 있는 이런 대화 속에 '사장', '돈 벌어야 하는 나'가 진짜 나는 아니라며 혼동할 때가 있다. 주변에서 나에게 던지는 '언어로서의 나' 즉 '상징계의 나'는 진짜 나를 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자신의 '이미지'와 사랑하게 되면 큰 일이 난다. 진짜의 나를 못보고 또 언어의 자신도 듣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나르시시즘 혹은 자기애성 인격장애라고 부른다. 산위에 올라가 남들이 자기를 보고있다고 생각하는 그 이미지만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남편이나 아내는 자존심이 강해서 그 높은 곳에 있는 이미지를 포기하고 내려올 자신이 없기 때문에 가족을 포기하거나 자녀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다 생명과도 같은 그 이미지를 잃어버리면 자괴감과 자기상실감(loss of self)으로 삶을 포기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실재계(real)의 나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의 나와 남이 나를 언어로 정의내리는 나가 아닌 순수한 나이다. 이 실재계 나는 순수하지만 바보다. 늘 '상상계의 나'와 '상징계의 나' 때문에 상처받고 힘들면서도 그저 그렇게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이미지의 나(상상계)와 자녀들이 부르는 엄마의 나(상징계)와는 관계 속에서 답답하거나 힘들 때 불쑥 튀어나오는 나(실재계), 혼자 여행할 때 소리없이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따라가며 느껴지는 눈물의 나(실재계)를 잘 돌봐줘야한다.
정리하자면 그릇에 담긴 물과 그릇에 붙어있는 이름표를 생각하면 쉽다. 그릇은 상상계의 나, 그릇에 붙은 이름표는 상징계의 나, 그 속에 담긴 물은 실재계의 나인 것이다. 그릇에 따라, 이름표에 따라 물의 모양도 바뀐다. 그릇이 찌르러지고 이름이 부정적이면 그만큼 물의 결정체도 찌그러진다.
노래 가사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뿐만 아니라 '내 밖엔 내가 너무도 많아~'인 것이다. 부부는 속에 있는 나를 이야기 나누어야 하지만, 밖에 있는 나(상상계와 상징계)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눠야 한다. 상상계의 아픈 나와 상징계의 힘든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나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서로 들어줘야한다. 그것이 부부가 둘이서만 시간을 만들어서 꼭 해야할 일이다.
<이재연 교수>
출처 : [심리학 그리고 생각] 네이버 카페 http://me2.do/xwiMV2NK
미국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자기(me myself)를 물질적 자기(material self), 사회적 자기(social self), 정신적 자기(spiritual self)로 나눴지만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나(I myself)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상상계의 나', '상징계의 나', '실재계의 나'가 그것들이다.
상상계(imaginary)의 나는 거울에 비친 나를 의미한다. 즉 이미지다. 인간은 평생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볼 기회가 없다. 오직 거울이야 유리 혹은 물과 같이 비춰줄 수 있는 중간의 대상에 의지해서 자신을 본다. 다시 말하면, 진짜 나가 아닌 '거울에 비친 나' 혹은 '남이 바라보는 나'가 바로 상상계의 나다. 진짜나와 상상계의 나 사이에 거리가 크면 클수록 정신분열이 강해지게된다.
예를 들면, 여성들이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때가 있다. 나는 그냥 나인데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주름만 늘어가는 상상계의 나의 모습이 거울에 가득해서 진짜 나는 없다고 느낄 때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게 된다.
남성의 경우도 비슷하다. 저녁에 들어와 거울을 보는 순간 소리없는 눈물을 흘린다. 거울속에 피곤에 눌린 상상계의 나를 보면서 아직도 어린 자아를 누르고 아빠로서의 무게를 감당해야하고, 밖에서 인정받지 못한 내가 집에와서도 설 자리없는 상상계의 나를 거울에서 마주하는 순간 진짜 나의 울음이 폭발하는 것이다.
상징계(symbolic)의 나는 '언어로 설명되는 나'를 말한다. 어디학교 출신의 나, 누구의 자식의 나, 누구의 부모의 나, 어떤 경력의 나 처럼 이미지인 상상계의 나를 '말'로 '언어'로 담아내는 것이 바로 상징계의 나다. 이런 말과 언어로 정의내려지는 상징계의 나도 '진짜 나'가 아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시도때도 없이 "엄마! 엄마~ 엄마? 엄마..."라고 자신을 부르지만 그런 엄마도 지치고 힘들 땐 자신의 '엄마'가 필요한 '딸'로 불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돌아가신 엄마를 사진에 있는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상상계의 엄마를 붙들고 울기만 하게된다. 이때 남편이 다가와 장모님 이름 부르며 "○○여사 따님~ 왜이러셔~ 힘내!"라고 자신이 원하는 '상징계의 나'를 불려주면 좋으련만 눈치없이 딸들 이름부르며 "○○엄마 왜그래. 힘내"라고 하면 더 큰 눈물이 난다.
반대로 남성의 경우 식당에서 만난 지인이 "아이고 ○사장~ 반갑구만~ 돈 잘벌지? 한 턱 내야지 언제 쏠꺼야~"라고 말하면, "에이~ 요즘 경기 어려워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 웃고 넘길 수도 있는 이런 대화 속에 '사장', '돈 벌어야 하는 나'가 진짜 나는 아니라며 혼동할 때가 있다. 주변에서 나에게 던지는 '언어로서의 나' 즉 '상징계의 나'는 진짜 나를 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자신의 '이미지'와 사랑하게 되면 큰 일이 난다. 진짜의 나를 못보고 또 언어의 자신도 듣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나르시시즘 혹은 자기애성 인격장애라고 부른다. 산위에 올라가 남들이 자기를 보고있다고 생각하는 그 이미지만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남편이나 아내는 자존심이 강해서 그 높은 곳에 있는 이미지를 포기하고 내려올 자신이 없기 때문에 가족을 포기하거나 자녀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다 생명과도 같은 그 이미지를 잃어버리면 자괴감과 자기상실감(loss of self)으로 삶을 포기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실재계(real)의 나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의 나와 남이 나를 언어로 정의내리는 나가 아닌 순수한 나이다. 이 실재계 나는 순수하지만 바보다. 늘 '상상계의 나'와 '상징계의 나' 때문에 상처받고 힘들면서도 그저 그렇게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이미지의 나(상상계)와 자녀들이 부르는 엄마의 나(상징계)와는 관계 속에서 답답하거나 힘들 때 불쑥 튀어나오는 나(실재계), 혼자 여행할 때 소리없이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따라가며 느껴지는 눈물의 나(실재계)를 잘 돌봐줘야한다.
정리하자면 그릇에 담긴 물과 그릇에 붙어있는 이름표를 생각하면 쉽다. 그릇은 상상계의 나, 그릇에 붙은 이름표는 상징계의 나, 그 속에 담긴 물은 실재계의 나인 것이다. 그릇에 따라, 이름표에 따라 물의 모양도 바뀐다. 그릇이 찌르러지고 이름이 부정적이면 그만큼 물의 결정체도 찌그러진다.
노래 가사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뿐만 아니라 '내 밖엔 내가 너무도 많아~'인 것이다. 부부는 속에 있는 나를 이야기 나누어야 하지만, 밖에 있는 나(상상계와 상징계)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눠야 한다. 상상계의 아픈 나와 상징계의 힘든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나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서로 들어줘야한다. 그것이 부부가 둘이서만 시간을 만들어서 꼭 해야할 일이다.
<이재연 교수>
출처 : [심리학 그리고 생각] 네이버 카페 http://me2.do/xwiMV2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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