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 회사 실무회의 적용(1)
퍼실리테이션을 배운 이후, 회사에서는 어쩌면 처음으로 가져보는 회의다운 회의였다. - 통상 회사에서는 일방적인 '보고회'나 지시하달형 회의가 주류를 이룬다. 물론 이 역시도 내가 주재하는 회의는 아니었지만 회의시작 30여분 만에 기존의 '막장회의' 스타일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부득불 내가 앞에 나서게 된 것이다.
마음 속으로는 '나는 퍼실리테이터다', '나는 퍼실리테이터다'를 연신 외쳐대었고, 참석자 모두가 나름대로는 잘 해 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다잡았다. 모두의 의견이 동등하게 귀중하므로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사실 나는 회의진행을 잘하는 편에 속한다. 상황파악이 빠르고 이슈선점 능력도 뛰어나다. 논리적이며 말빨(?)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짧은 시간에 결론을 이끌어내고 반대세력을 적절히 제압하는 노하우도 있다. 거기에 직급이나 연륜이라는 권위까지 탑재한다면 거칠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퍼실리테이션이 아니다. 지금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깨달아 알고 있다.
역시나 빅마우스가 있었다. 회의 목적에서 벗어난 주제로 팀장과 논쟁이 벌어졌다. 좋은 의견이라고 얘기해주고는 화이트보드에 기록했다. 하지만 오늘 회의목적에서는 벗어나므로 따로 논의하는 것으로 양해를 구했다. 맨 먼저 입을 연 K과장은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비판적인 의견만 장황하게 늘어 놓았다. 나의 기술(?)을 사용하고픈 욕구를 억누르고 끝까지 경청했다. 그의 말이 사실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느닷없이 W부장의 자기고백적인 발언이 이어졌다. 이 얘기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었다. 많은 시선이 화이트보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종래의 회의 분위기와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공유하는 순간이었다. 이어서 긍정적인 의견이 보태지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참여자 모두가 동의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미 한 시간 20여분의 시간이 지났기에 이 쯤에서 마무리를 지으려는데 그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K대리가 입을 열었다. 그 안대로 실행하면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었다. 듣고보니 정말 맞는 말이었고 모두가 수긍을 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단번에 대안이 제시되었고 결론은 약간 수정되었다. 그 때 또 다른 이의제기가 들어 왔다. 마찬가지로 일리있는 말이었다. 결국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참가자 모두가 입을 열어 발언을 한 셈이다. 최종 수정된 결론을 제시하며 얘기했다. "이대로 하면 가능할까요?",
"그럼 언제부터 실행이 될 수 있을까요?"
대답은 당장 가능하다는 것이다. 제법 만족스럽게 회의가 마쳐졌다.
회의 초반에 밀어붙이기 식으로 회의를 진행하려 했던 L팀장은 중반 이후로는 조용히 참관모드로 일관했다. 굳이 개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듯하다. 아니, 예상치 못한 긍정적인 흐름에 적잖이 고무된 표정이었다. 회의를 마친 후 L대리가 살짝 다가와 인사를 건냈다.
"수고하셨습니다, 부장님^^;;;"
"어때? 실질적인 결론이 나온 거 같아?
잘 실행되겠어?" 넌지시 물어 보았다.
L대리가 엄지척을 세우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전 인터뷰도, 프로세스 설계도 없었고 어떤 기법이나 도구의 사용도 없었다. 그 흔한 포스트잇 한 장 사용하지 못한 회의였다. 단지 몇 가지 질문과 아직은 어설픈 인터렉션 스킬이 조금 사용되었을 뿐이다. 때문에 어딘가에 '실천사례'로 제출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회의이긴 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슴 터질듯한 감격을 주는 '첫 회의'가 되었다. 나에게 선물한 작은 격려가 되었다. 비록 재현되리란 보장이 없고, 여전히 지속가능성도 높지 않은 여건이긴 하지만
감사와 감격으로 넘치는 하루가 되었다.